
여름의 끝에서 다시 읽는, 오래된 공책과 손글씨와 그 사이에 낀 영수증에 관하여
서랍 맨 아래 칸은 언제나 지층 같다. 위쪽은 최근이고 아래로 갈수록 오래된 것이 나온다.
스무 장짜리 공책
첫 장에는 그해의 계획이 적혀 있었다. 둘째 장부터는 계획이 아니라 목록이었다.
사야 할 것, 갚아야 할 것, 미뤄둔 것. 열 장쯤 넘어가면 글씨가 급해진다.
-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 목록은 대부분 지워졌다
- 그 사이에 낀 종이들만 그대로다
끼워져 있던 영수증에는 날짜와 금액과 상호가 남아 있다.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얼마를 냈는지는 적혀 있다.
기록은 남기려 할 때보다, 남겨질 때 더 정확하다.
공책은 다시 서랍 맨 아래로 돌아갔다. 다음에 꺼낼 때는 또 다른 지층이 위에 쌓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