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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선반 위 병들에 주종과 함께 마신 사람 꼬리표가 붙은 표지
연재진짜 딸깍하는 AI · 14회

집에 쌓인 술에 이야기를 붙였다 — 라벨 한 장이면 AI가 설명을 채우는 나만의 술 기록장

코로나로 밖에서 술 마시기 어려워지자 집에 술이 쌓였다. 라벨 사진 한 장이면 술 설명은 AI가 채우고, 나는 보관 위치와 누구와 어땠는지만 적는 기록 앱을 주말 이틀에 만들었다. 비비노·셀러트래커·와인그래프 같은 국내외 사례와 함께, 나만을 위한 작은 서비스의 문턱이 얼마나 낮아졌는지.

· SYSOP · 조회 2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밖에서 술 한잔하기가 어려워졌다. 식당은 일찍 문을 닫았고 모임은 미뤄졌다. 그러자 술이 집으로 들어왔다. 마트에서 눈에 밟힌 와인, 선물 받은 위스키, 언젠가 마시려고 사둔 사케가 선반에 한 병씩 늘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0년 말 음주자 2,000명에게 물었더니, 코로나 이후 술 마시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람 중 92.9%가 '집'이라고 답했다. 숫자는 더 노골적이다. 관세청 통계로 와인 수입액은 2020년 3억 3천만 달러에서 2021년 5억 6천만 달러로 1년 만에 70% 가까이 뛰었고, 2022년엔 5억 8천만 달러로 역대 최대를 찍었다. 위스키는 조금 늦게 따라와 2023년 수입량이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많았다. 미국도 비슷해서, 봉쇄가 시작된 2020년 3월 한 주 동안 소매 주류 매출이 전년보다 55%쯤 늘었다는 닐슨 집계가 있다.

그렇게 병이 쌓이니 문제가 생겼다. 이게 전에 마셨던 그 와인인지, 그때 누구랑 마셨고 어땠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서 마시는 술은 가게에서 마시는 술보다 사연이 많은데, 그 사연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해 보기로 했다.

사진 한 장, 나머지는 AI가

엑셀에 적어보다가 며칠 만에 그만뒀다. 병 하나 적으려면 이름을 검색하고 종류와 원산지를 찾아 넣어야 하는데, 그게 귀찮으면 기록은 금방 끊긴다. 그래서 원한 건 하나였다. 라벨을 찍으면 술에 대한 설명은 알아서 채워지고, 나는 내 이야기만 적는 것.

집에 있는 술을 기록하는 웹앱을 만들고 싶다. 술병 라벨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 무슨 술인지 알아내서 종류·원산지·특징·어울리는 음식·마시는 법을 채워 달라. 나는 보관 위치와 누구와 마셨는지, 어땠는지만 적고 싶다.

이렇게 부탁하고 주말 이틀을 붙들었더니 돌아가는 앱이 나왔다. 사진을 올리면 몇 초 뒤에 이런 설명이 붙는다.

술 기록 앱에서 라벨 사진을 올리자 AI가 채워 넣은 와인 설명과 페어링, 음용 추천

그리스 북부의 한 와이너리에서 만든 레드 와인이고, 검은 과실 향과 부드러운 타닌이 특징이며, 양고기 스튜나 페타 치즈와 어울리고, 16~18도에서 보르도 잔으로 마시면 좋다는 내용이다. 와인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이 몇 줄이 병을 다시 보게 만든다. 내가 직접 찾아 적었다면 절대 이만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는 AI가, 이야기는 내가

앱이 하는 일은 결국 두 칸으로 나뉜다. 왼쪽은 AI가 채우는 칸이다. 주종, 원산지, 맛의 특징, 어울리는 음식, 마시기 좋은 온도. 오른쪽은 내가 채우는 칸이다. 이 병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마셨는지, 그날 어땠는지, 몇 점을 줄지.

한 병의 기록 카드: AI가 채우는 주종·원산지·설명·페어링·음용법과 내가 적는 보관 위치·함께 마신 사람·감상·평점

써보니 오른쪽 칸이 진짜였다. "거실 선반 두 번째 칸"이라고 적어두면 손님이 왔을 때 헤매지 않는다. "대학 동기 셋, 고기랑 먹으니 확 살아남"이라고 적어둔 와인은 다음에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 다시 꺼내게 된다. 지금 선반엔 와인이 스무 병 넘게, 위스키와 맥주가 열 병씩 올라가 있다. 술 목록이라기보다 몇 년 치 저녁의 기록에 가깝다.

물론 AI가 늘 맞지는 않는다. 라벨이 흐리거나 조명이 반사되면 엉뚱한 술로 알아듣기도 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양조장 술은 AI도 잘 모른다. 라벨에 도수가 없으면 그럴듯한 숫자를 지어내기도 해서, 확인 못 한 값은 비워 두게 했다. 그래서 AI가 쓴 건 초안으로 보고, 이상하면 내가 고친다. 대부분은 손댈 일이 없다.

이런 앱, 세상엔 이미 많다

만들고 나서 둘러보니 비슷한 서비스가 꽤 많았다.

가장 유명한 건 덴마크에서 시작한 비비노(Vivino)다. 라벨을 찍으면 어떤 와인인지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의 평점을 보여준다. 회사 발표로 사용자가 7,700만 명이 넘고, 누적 라벨 스캔이 35억 건을 넘었다. 재밌는 연구도 있다. 보르도 와인 리뷰 20만 건을 분석한 2024년 논문을 보면, 비비노의 대중 평점은 전문가 점수와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결이 달랐다. 전문가는 앞으로 얼마나 잘 익을지를 보고, 대중은 지금 마셨을 때 맛있는 오래된 빈티지에 점수를 더 줬다.

미국의 셀러트래커(CellarTracker)는 2003년에 한 개인이 자기 와인 셀러를 관리하려고 만든 프로그램에서 출발했다. 찾는 와인이 데이터베이스에 없으면 사용자가 직접 등록하는 방식이라, 개인의 기록이 쌓여 거대한 공용 데이터베이스가 됐다. 2014년에 이미 3천만 병을 추적하고 있었다. 맥주 쪽엔 마신 맥주를 '체크인'하고 배지를 모으는 언탭드(Untappd)가 있고, 인빈토리(InVintory)라는 앱은 실제 와인 냉장고를 3D로 옮겨 놓고 병마다 칸을 지정하게 해준다. 내가 "거실 선반 두 번째 칸"이라고 적는 걸 아예 입체로 만든 셈이다.

국내에도 있다. 네이버 앱에서는 2011년부터 와인 라벨을 찍어 정보를 찾을 수 있었는데, 와인 매체 와인21이 데이터를 댔다. 국내 스타트업 와인그래프는 라벨 인식과 취향 추천을 내세웠고, 2021년엔 편의점 CU 앱에 라벨 검색을 붙였다. 홈술 바람을 제대로 탄 건 주류 스마트오더 앱 데일리샷이다. 기록 앱은 아니지만, 앱으로 술을 주문하고 가까운 매장에서 찾아가는 방식으로 2024년 말 월 사용자 100만 명을 넘겼다. 개인 개발자가 만든 '마와셀'처럼 여러 셀러와 선반을 관리하고 향을 아이콘으로 기록하는 작은 앱도 있다.

서비스어디서잘하는 것
비비노덴마크라벨 스캔, 수천만 명의 평점
셀러트래커미국셀러 재고·시음노트, 사용자가 함께 만드는 DB
언탭드미국맥주 체크인과 배지
인빈토리미국와인 냉장고 3D 배치, 병별 위치
와인21·네이버한국라벨 찍어 와인 정보 검색
와인그래프한국라벨 인식, 취향 추천, 편의점 연동
데일리샷한국주류 주문·매장 픽업

그래서, 왜 이게 딸깍인가

이 서비스들은 대부분 '정보'를 잘한다. 수천만 명의 평점과 수백만 종의 데이터베이스는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대신 내가 원했던 건 조금 달랐다. 이 병을 누구와 마셨고, 어디에 두었고, 그날 어땠는지. 남들 평점보다 나와 내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건 "그냥 기존 앱 쓰지 뭐" 하고 접었을 것이다. 나 혼자 쓰자고 화면을 짜고 데이터를 저장하고 술 정보를 붙이는 건 품이 너무 들었다. 이제는 술에 대한 설명은 AI가 채워 주니, 나는 내게 필요한 칸만 정하면 된다. 주말 이틀이면 내 선반에 딱 맞는 앱이 생기고, 내가 안 쓰는 기능은 없고, 구독료도 없다.

거창한 서비스가 아니어도 된다. 내 생활의 작은 습관 하나를 위한 앱을 만드는 문턱이 이만큼 낮아졌다. 그게 이번 딸깍에서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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